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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추억

입력일자: 2011-04-07 ()  

 

내전이 한창인 리비아는 면적이 한반도의 8배이며, 인구는 2009년 통계에 의하면 646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인구의 97%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고 있으며, 수도는 벵가지에서 카다피 집권이후 트리폴리로 옮겼다.

1969 91일 당시 27세의 무하마르 알 카다피 대위는 무혈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청년 장교그룹 12명으로 구성된 혁명평의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의 제2 산유국이며 원유를 대부분 유럽 국가에 공급하고 있다. 생산되는 원유는 저유황 고품질이다. 리비아의 국내 정유능력은 일간 38만 배럴이지만 처리량은 28만 배럴 수준이다. 리비아는 국토의 90%가 사하라 사막지대이며, 연간 강수량이 300밀리리터에 불과하다. 1984년에 착수된 대규모 수로관 프로젝트인 대수로 공사는 리비아 남동쪽의 지하수 층에서 북쪽의 주요도시들로 지하수를 수송하여 30~50만 헥타르의 사막을 관개하는 계획으로서 총공사비 200억 달러가 넘는 초대형 프로젝트이다.

나는 외국어 대학에서 아랍어를 전공하고 같은 대학 아랍어 연수원을 수료한 후 1979년부터 2년간 대우개발 리비아 벵가지 지사를 시작으로 트리폴리, 세브하 지사를 두루 거치며 리비아에서 일했다. 그래서 지금도 머릿속에는 리비아 지도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 당시 대우개발은 리비아가 자랑하고 있는 건물인 가리우니스 의과대학 공사를 시작으로 리비아 전역에서 12곳의 건설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대한민국은 1979년 당시 트리폴리에 총영사를 파견하고 있었으나 총영사관 관저도 없이 호텔에서 사무실을 빌려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반면에 북한은 대사를 파견하고 있었고,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 나는 트리폴리 지사에서 텔렉스로 이 사실을 접수했다. 그 당시는 팩스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리바아 사람들은 순수하다. 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돈 가방을 자동차 위에 올려놓은 채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걸어 출발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동네 아이들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회사 돈을 그대로 잃어버릴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을 잠시나마 보냈던 리비아가 내전에 휘말리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니 기가 막힌 일이다. 리바아에 석유 자원이 없었더라면 카다피는 벌써 권좌에서 물러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대우개발은 사하라사막 남단 맨 끝에 있는 아우조라는 사막도시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고 그 당시에도 카다피는 이웃나라 차드를 공격해서 대우개발은 공사를 일시 중단하고 부상병을 치료한 적도 있었다. 나는 현장소장과 함께 사하라 사막을 자동차로 남단해서 비행장 공사장을 가본 적이 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사하라 사막이 모래로 뒤덮인 것이 아니라, 모래알같이 부서져있는 조개껍질로 덮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이 과거에 바다 밑이었음을 보여주는 지질학적 증거이다.

미국과 연합군이 반드시 이번 기회에 카다피를 권좌에서 몰아내 리비아 국민이 원하는 자유를 안겨주게 되길 바란다. 대학 캠퍼스가 아니면 길거리에서 여학생과 이야기도 나눌 수 없는 나라, 외국인이 리비아 여성과 결혼하려면 종교도 바꾸어야하고 리비아에서만 살아야 하는 나라, 이것이 리비아다. 이런 규정은 카다피가 ‘Green Book’이라 불리는 ‘키타브 아크다르’에 써놓은 것들이다.

이번에 카다피를 축출하지 못한다면 리비아인들의 자유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리비아인들이 흘리고 있는 피는 고귀하다. 그 피가 헛된 것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Mitchel Maeng 의류.봉제 상담소 사무총장